시가현 오미 하치만시 룸 학군의 활성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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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학구 각 지역에 대하여

무사 쵸

349세대 남성368명/여성401명 합계 769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나카센도의 역참인 무사주쿠가 있는 마을입니다. 역참이란 가도(중요도로)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 휴게소로서 또한 사람과 말을 교대하는 시설을 설치하도록 지정된 장소입니다. 나카센도가 에도시대에 정비된 것은 역참 마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수 있으나 무사주쿠의 경우는 이미 중세에 그 기능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토칸 기행』여행일지의 1242년 8월 13일자에 「무사테라 절이라는 산사」근처에서 숙박했다는 기술을 비롯하여『나쿠사메 쿠사』에는 1418년 3월「무사의 숙소를 지나」등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또한『코다이기』에 의하면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섬기던 고코곤 천황이 무사 지역에 머물렀다는 기사도 있어 교통의 중계지로서 중요시되었다고 합니다.
  • 무사 쵸1
  • 무사 쵸2
「무샤린도」
오미하치만시의 초여름의 꽃입니다. 무사쵸에서 발견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시소과의 식물이며 6월에서 7월에 걸쳐 줄기 상부에 옅은 청보라색/흰색/분홍색의 꽃이 핍니다.
무샤린도

쵸코지 쵸

193세대 남성 217명/여성 243명 합계 460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쵸코지 절」
쇼토쿠 태자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오래전에는 「무사테라 절」이라고 했습니다. 남북조 내란기에는 세번에 걸쳐 고코곤 천황이 들렀습니다. 그후 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난을 피해 이 절에 머물렀습니다. 에이로쿠, 겐키 시대의 난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칸에이 시기에 영주 마츠다이라 사다츠나가 재건했습니다.
「후타츠바시」
오가와 타헤가 세운 후타츠바시 유적의 석비가 있습니다. 일찍이 오가와 가문은 다리의 수문장을 맡았고 칭호를 후타츠바시로 불렀다고 합니다. 에도시대에는 검문소장으로서 통행인의 체크를 하였습니다.
「하나노키」
초코지 절의 경내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쇼토쿠 태자가 이 절의 건립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옵니다. 높이 15미터, 수령 약 5-6백년. 일본고유종으로 한대식물에 속합니다. 초코지 절 경내의 하나노키는 일본 최남단에서 생육하고 있는 나무로서 귀중합니다.
  • 쵸코지 절1
  • 쵸코지 절2

니시주쿠 쵸

44세대 남성 58명/여성 82명 합계 140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니시주쿠 쵸
이바 저택의 상징인 니시주쿠라는 마을 이름은 무사주쿠의 서쪽(니시)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무사에 인접함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니시주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헌상으로 이 시기의 니시주쿠에 관해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고고학상의 성과로 흥미있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니시주쿠 성의 유적으로 전해오는 이바저택 인접지에서 흙벽과 해자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근처에 「쿠몬메」라는 관청을 의미하는 글자가 있는 점에서 니시주쿠 마을은 사유지를 관리하는 무사가 거주한 마을이었다고 추정됩니다. 이외에도 「활터」와 「이바관」등의 지역명이 전해오고 있어 사사키씨의 밑에서 활동한 중세의 소영주 존재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바 테이고 저택 유적지」
이바 테이고는 1847년에 현재의 오미하치만시 니시주쿠 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치만의 국학자 니시가와 요시스케의 문하생이 되어 나라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메이지시대에는 나가사키와 도쿄, 오사카, 하코타테의 법원에서 법관으로 활약. 그러나 1879년 이것을 그만두고 숙부 히로세 사이헤의 권유로 스미토모에 입사했습니다. 벳시 구리광산 경영에 있어 그 부산물인 삼림과 농작물의 피해에 대해 동제련소의 이전, 식림 활동등에 열의를 가지고 임했습니다. 그후 1890년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자 중의원에 당선, 1900년 스미토모 본사로 돌아가 제2대 총이사에 취임했습니다, 1904년 57세로 은퇴하여 오츠시 이시야마에서 살았으며 1926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이바 테이고의 집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는 이바 가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큰 녹나무가 지금도 건장하게 뿌리를 내린채 지켜보고 있습니다(오미하치만의 역사에서 발췌)

노다 쵸

40세대 남성 66명/여성62명 합계 128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서)

「용수」
노다쵸에서는 일찍이 생활과 휴식의 장소로서 친근했던 「용수」를 복원하여 마을 주민들의 쉼터이자 마을 활성화의 심볼로서 정비, 유지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오미하치만시의 가을의 꽃으로 지정된 100만 송이의 코스모스밭이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 노다 1
  • 노다 2
향토의 옛날 이야기
「히미츠 다리와 촌장」
노다쵸에서 이즈모야마를 향하여 흐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우거진 숲이 있었습니다. 이 숲속에 「히미츠 다리」로 불리는 흙으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노다촌의 촌장이 결혼식에 참석후 귀가길에 한손에 제등, 한손에 음식이 든 찬합을 들고 기분좋게 히미츠 다리까지 왔습니다. 「나야말고 이곳의 여우한테 홀리지 말아야지」하고 혼잣말을 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시럭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등불이 꺼지고 들고 있던 제등을 뺏겨 버렸습니다. 「역시 나타났군」 하며 들고있던 찬합을 힘껏 품에 안았습니다. 아침일찍 농부가 논을 보러 나왔습니다. 촌장이 가슴에 소중히 돌을 안고 같은 길을 뱅뱅 돌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촌장의 어깨를 툭 쳤습니다. 그러자 촌장은 「제발 나한테 등불을 줘 부탁이야」 농부는「아직도 속고 있구만」 하며 촌장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오미하치만 향토의 옛날이야기에서 발췌)

고쇼우치 쵸

55세대 남성91명/여성81명 합계 172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고레타카 친왕과 고쇼우치」
옛날에 고레타카 친왕이 숨어있었다고 하는 동굴의 유적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커다란 돌로 둘러싸여 고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쯤에 몬토쿠천황의 아들이 황위계승 다툼에 패해 이곳에 도망왔을때 촌장은 친왕과 그 부하들을 숨겨주고 세끼의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친왕이 이곳을 떠날때 이마을에 「고쇼우치」라는 이름을 선사하였습니다. 친왕이 사망한 후 그 부하들이 이곳에 「호렌지」라는 절을 세워 친왕의 명복을 기원했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 그 호렌지도 없어졌으나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있습니다. 고쇼우치 팔경의 하나로 「호렌지의 만종」이라는 것이 있어 그 모습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 고쇼우치
  • 고쇼우치

토모사다 쵸

272세대 남성141명/여성 131명 합계272명(2014년 10월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야사카 신사」
토모사다 쵸 야사카 신사 제례는 원래 5월 제례(창포 마츠리)이며 예전에는 5월 5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즈모 신사 제례와 일원화하기로 하여 그 일시를 4월 5, 6일로 개정하고 약 20년 전부터 4월 첫째 일요일을 마츠리 날로 정했습니다. 야사카 신사의 제례는 기본적으로 토모사다쵸의 일족 약 70세대와 인접한 노다쵸의 일족 약 30세대로 실시하며 관솔불은 각각 따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야사카 신사의 제례조직은 샤모리를 필두로 6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와카렌추는 15세 이상으로 15명 정도로 구성됩니다. 추로는 전부 24명이며 그 비율은 토모사다쵸가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6명, 노다쵸가 나머지 8명입니다. 추로는 주로 미코시를 짊어지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추로의 위에는 마카나이가 있어 마츠리의 숙소에서 접대를 하는 역할이 3명, 그 위에 미코시반이라는 추로에서 샤모리까지 약 40명 정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족의 대표(임기 2년)가 2명 있습니다. 샤모리는「6인중」으로 불리며 65세를 최장로로 하여 6명이 맡습니다. 샤모리 이외의 역할은 토모사다쵸, 노다쵸 공통이며 샤모리 역할만은 항상 토모사다쵸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20년 전까지는 4월 2일에 관솔 만들기를 했습니다. 관솔 만들기는 기본적으로 마을의 일족이 맡았으며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와카렌추와 추로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샤모리는 이날 제례후 연회를 하는 나오라이의 장소를 청소합니다. 토모사다쵸의 관솔불은 야사카 신사의 승마장에 있는 「오본 관솔」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히노키 나무의 말뚝을 8개 세우고 옆으로 4개 묶음의 푸른 대나무로 주위를 감싼다음 떡갈나무 가지로 형태를 만든 관솔불로 일명 「떡갈나무 관솔」로도 불립니다. 관솔은 그것이 설치되는 야카타 신사의 승마장에서 제작되며 그 재료는 히노키 목재의 말뚝, 대나무, 떡갈나무와 히노키의 가지, 유채씨의 기름을 짠 찌꺼기, 갈대, 밧줄, 짚 등입니다. 이 오본 관솔의 옆으로 마츠리 전날 오전중에 노다쵸로부터 삿갓 관솔이 도착합니다(오미하치만의 역사 제 3권에서 발췌)

니쇼라이 쵸

329세대 남성 411명/여성494명 합계 905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아와코 지조」
니쇼라이 니쇼라이쵸에는 집의 지조 외에 지역의 지조로서 「아와코지조」가 있습니다. 사이후쿠지 절의 옆에 지조당이 있어 지조봉 축제가 되면 그 앞에 「아와코엔메이코야스 지조」라고 적힌 등롱이 설치되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옵니다. 경내에는 어린이가 그림을 그려넣은 등롱이 줄을 서고 저녁에는 본당에서 염불을 합니다. 이 지조의 유래는 옛날 찻집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여행중이던 스님을 사랑하게 되어 스님이 마시다 남긴 차를 마신 후 출산하고 3년 후에 다시 그 스님을 만나게 되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경읽는 소리와 매우 닮은 것을 신기하게 여긴 스님이 그 이유를 묻게되고 사실을 듣고나서 아이에게 입김을 불자 그 아이가 거품이 되어 없어져 버렸다. 스님이 말하기를 서쪽 땅밑에 지조가 있을테니 이 아이를 위해 그 곳에 불당을 짓고 안치하라고 한 것이 마츠리를 하게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조가 가라앉아 있던 이 연못을 「아라이이케」로 불렀으며 후일 이것이 「오이라이」가 되어 결국 니쇼라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오미하치만의 역사 제3권에서 발췌)
「노가미 축제」
매년 8월 16일 경에 노가미 축제를 개최합니다. 행사에서는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 관리 담당자들과 지역 대표들도 모여 통괄 지휘를 합니다. 이른 아침에 임원들이 오미야 신사의 사무실에 모여서 샤모리가 큰북을 두드리며 행사의 개최를 알립니다.
신관이 제례를 올리는 동안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경내에서 스모를 합니다. 스모를 하는 아이들은 시합을 하기 전에 반드시 노가미신을 모신 석비에 인사를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스모가 끝난후 각자 과자가 주어지고 행사가 끝난 뒤 공물을 나누어 먹는 연회가 베풀어집니다(오미하치만의 역사 제3권에서 발췌)
니쇼라이

수에히로 쵸

615세대 남성580명/여성602명 합계1,182명(2014년 10월 1일 현재 주민기본대장 자료에 의함)

「오미규 소고기」
막부 말기 무렵 쿄토 오사카에서 소고기를 팔기 시작하던 때부터 오늘날의 고급품으로 알려진 오미규 소고기를 키워왔습니다.
에도시대에는 쿠보 무라로, 메이지 행정 시행까지는 미나미노로 불려왔습니다. 쿠보 무라는 나카센도와 핫푸 가도의 분기점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광범위한 근린지역의 죽은 소와 말에 대한 권익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와타 무라"와 마찬가지로 쿠보 무라도 하나의 독립된 촌락으로서의 내실을 기하고 있었지만 제도적으로는 독립이 인정되지 않아 인접한 니쇼라이 무라의 일부로 취급되었습니다. 쿠보 무라와 소고기에 대해 살펴보면 1816년의 금전 장부에서 니쇼라이 무라가 쿠보 무라에 고기 대금을 지불한 기록이 있습니다. 시대가 조금 달라지지만 1867년에 쿠보 무라에서 잡은 소는 「껍질」과 「소도구」 「안주」 「왁스」로 나누어 팔았으며 여기서의「안주」란 식용 고기로 여겨집니다. 또한 히코네 번의 헌상물과는 다른 형태로 소고기의 영양가가 높다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무사들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동쪽 오미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특징으로서 드넓은 자연속에서 자라난 오미규 소고기에게는 독특한 윤기가 있습니다. 육질은 부드럽고 마블링도 적당해서 입안에서 풍부한 풍미와 녹는듯한 달콤함이 퍼져나갑니다. 또한 오미규 소고기의 괄목할 점은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지방질입니다. 또한 이 지방질에 쫀득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 수에히로
  • 수에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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